서연 (오호 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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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연은 384년 모용홍에 의해 건국되어 394년 멸망한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전연이 멸망한 후 관중으로 이주된 선비족 모용부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모용홍과 모용충 형제가 서연 건국에 기여했다.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나, 내분과 혼란을 겪으며 여러 군주가 교체되었다. 결국 후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황제의 권력이 약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선비족의 의향에 좌우되는 등 불안정한 정치적 특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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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오호 십육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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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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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명 | 燕 (Yan) |
통칭 | 西燕 (Xī Yān, 서연) |
역사 | |
건국 | 384년 |
멸망 | 394년 |
주요 사건 | 모용충의 황제 칭위 (385년 1월 27일) 장안 점령 (385년) 장안 포기 (386년) 장자 정착 (386년) |
수도 | |
수도 | 장안 (385년–386년) 장자 (386년–394년) |
정치 | |
정치 체제 | 제국 |
통치자 | |
황제 | 모용홍 (384년) 모용충 (384년–386년) 모용영 (386년–394년) |
언어 및 종교 | |
사용 언어 | 중국어 |
종교 | 해당 정보 없음 |
통화 | |
통화 | 해당 정보 없음 |
지도 관련 | |
이전 및 이후 | |
이전 국가 | 전진 |
이후 국가 | 후연 |
2. 역사
384년, 전진의 부견이 비수 대전에서 패배하자, 모용홍과 모용충 형제는 관중(關中)에서 선비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홍은 장안 동부에서 제북왕(濟北王)을 자칭했고, 모용충은 병주(幷州) 평양(平陽)에서 거병하여 서연이 건국되었다.
모용충은 전진 토벌군에 의해 격파되었으나 모용홍과 합세했고, 모용홍은 장안을 함락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모용충이 추대되어 아방성(阿房城)을 점령하고 385년 황제에 즉위했다. 386년에는 장안을 점령했으나, 선비족들의 귀향 요구로 인해 모용충이 살해되고 단수가 옹립되었다.
단수 역시 곧 살해되었고, 모용영 등이 모용의를 옹립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내분으로 모용의가 살해되고 모용요가 옹립되었다. 그러나 모용요는 민심을 잃어 모용영이 모용충을 옹립하고 문희(聞喜)까지 이주했다. 이후 모용충이 살해되고 모용영이 옹립되어 후연의 모용수에게 복속할 것을 표명하였다.
모용영은 전진의 부비에게 길을 빌려줄 것을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전투에서 승리한 후, 병주 남부 일대를 장악하고 장자(長子)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서연은 동진, 후진과 대립하고 후연, 적위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392년 적위가 후연에 멸망한 후, 적교(翟釗)의 망명을 받아들였으나 적교가 모반을 꾀하여 처형했다. 393년 후연의 공격을 받아 394년 멸망하였다.
2. 1. 건국 배경
370년 전연이 전진의 부견에 의해 멸망하자, 부견은 선비족 모용부를 대거 관중(關中)으로 이주시켰다. 이때 관중으로 이주된 모용홍, 모용충 형제는 부견이 비수 대전에서 패배한 후, 관중에서 선비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홍은 장안 동부에서 도독섬서제군사·대장군·옹주목·제북왕(都督陝西諸軍事大将軍雍州牧濟北王)을 자칭하였고, 모용충은 병주(幷州) 평양(平陽)에서 거병하였다.(384년)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서연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비수 전투에서 전진이 동진에게 패배하고, 모용수가 384년 하북성에서 후연을 재건하자,[1] 모용홍은 동관 동쪽으로 도망쳐 선비족을 모았다.[1] 화음에서 전진 군대를 격파한 후, 모용수를 새 재상으로 선언하고 대장군 등의 관직을 자칭했다.[1] 모용충 또한 평양에서 2만 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배하여 모용홍에게 합류했다.[1]
모용홍 등은 형 모용위를 옹립하여 전연을 재건하려 했지만, 모용위는 동생들에게 재건을 맡기고 장안에 머물렀다. 이에 모용홍은 384년 4월에 연흥으로 개원하여 정식으로 서연을 건국했다. 다만 모용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2. 2. 장안 점령과 내분
370년 전연이 멸망한 후, 전진의 부견은 선비족 모용부를 대거 관중(關中)으로 이주시켰다. 비수 대전에서 부견이 패하자, 관중에 있던 모용홍과 모용충 형제는 선비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384년 모용홍은 장안 동부에서 도독섬서제군사·대장군·옹주목·제북왕(都督陝西諸軍事大将軍雍州牧濟北王)을 자칭했고, 모용충은 병주(幷州) 평양(平陽)에서 거병했다.모용충은 토벌군에 의해 격파되었으나, 모용홍과 합세하였다. 모용홍은 토벌군으로 온 부예(苻睿), 요장 등을 격파하고 전진의 수도 장안을 함락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384년 6월, 장안으로 진격하던 도중 모용홍은 불만을 품은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동생 모용충이 추대되었다. 모용충은 전진군의 공격을 물리치며 장안으로 진격하여 아방성(阿房城)을 점령하고 장안을 포위하였다. 385년 정월, 모용충은 아방성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장안을 계속 포위 공격하여, 6월 말 부견과 부굉 등이 장안을 탈출하자 장안을 점령하였다.
장안을 점령한 모용충은 장안을 수도로 하여 나라를 경영하려 하였으나, 선비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386년 2월, 한연(韓延) 등이 모용충을 살해하고 단수를 옹립하였다.
단수는 곧 정변으로 살해되었고, 서연의 군벌 모용항(慕容恒)·모용영 등은 모용의를 옹립하고 선비족 40여 만 명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안을 버리고 이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내분이 일어나 모용의는 살해되고 모용항이 모용요를 옹립하였는데, 모용요는 곧 민심을 잃어 모용영이 세력을 잡았다. 모용영은 모용요를 죽이고 모용충을 옹립하였다. 모용영과 모용충은 다시 이주를 시작하여 문희(聞喜)에 도착하였는데, 후연의 모용수가 황제에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주를 멈췄다. 386년 6월, 모용충이 살해되고 모용영이 옹립되었는데, 모용영은 모용수에게 사신을 보내 복속할 것을 표명하였다.
2. 3. 모용영의 즉위와 멸망
386년 2월, 한연(韓延) 등이 모용충을 살해하고 단수(段随)를 옹립하였으나, 곧 정변으로 단수는 살해되었다. 서연의 군벌 모용영(慕容永) 등은 모용의(慕容顗)를 옹립하고 선비족 40여 만 명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안을 버리고 이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내분이 일어나 모용의는 살해되고 모용항이 모용요(慕容瑤)를 옹립하였는데, 모용요는 곧 민심을 잃어 모용영이 세력을 잡았다. 모용영은 모용요를 죽이고 모용충(慕容忠)을 옹립하였다.모용영과 모용충은 다시 이주를 시작하여 문희(聞喜)에 도착하였는데,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가 황제에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주를 멈췄다. 386년 1월, 모용수가 황제에 즉위하여 후연이 건국되었다. 6월에는 모용충이 살해되고 모용영이 옹립되었는데, 모용영은 모용수에게 사신을 보내 복속할 것을 표명하였다. 모용영은 모용수의 힘을 빌리기 위해 하동왕으로 칭하며 종속되었고, 전진의 부비(苻丕)를 격퇴했다. 10월에는 부비의 전진군과 싸워 승리했다.
모용영은 병주 남부 일대의 전진 세력을 일소하고 장자(長子, 현재의 산서성 장지)를 수도로 하여 황제에 즉위하였다. 386년 9월, 모용영은 장자로 천도하여 다시 황제로 즉위하여 자립했다.
서연은 병주 남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동진(東晉)이나 후진(後秦)과 대립하였고, 후연이나 적위(翟魏)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적위가 392년에 후연에게 멸망하자 모용영은 적위의 황제 적교(翟釗)의 망명을 받아들였는데 1년 뒤 적교가 모반을 꾀하였기 때문에 처형하였다.
이후 서연은 후연과 전연 부흥의 계승권을 놓고 다투었다. 모용영은 전연의 창시자 모용황(慕容皝)의 숙부인 모용운(慕容運)의 손자로서 모용황의 아들 모용준(慕容儁)의 후손들을 모두 죽였다.[1] 그러나 서연의 황족에서 후연으로 이반하는 자도 많았고, 또한 모용영이 모용수의 자손, 그리고 적류인 모용홍·모용충 등의 자손들을 살육한 결과, 서연은 고립 상태가 되었고 후연으로부터 393년부터 철저하게 공격을 받게 되었다. 393년 12월, 모용수가 서연을 공격하자 수개월 동안 전투를 치른 끝에 394년 8월에 멸망하였다. 모용영은 동진과 북위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거의 무시당했고, 394년 8월에 모용영은 모용수 앞에서 패사했다. 이로써 서연은 멸망했고, 그 세력은 후연에 흡수되었다.
3. 역대 군주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열문황제烈文|열문중국어 | 모용홍 | 384년 | 연흥 (燕興) 384년 |
위황제威|위중국어 | 모용충 | 384년 ~ 386년 | 연흥 (燕興) 384년 경시 (更始) 385년 ~ 386년 |
- | 단수 | 386년 | 창평 (昌平) 386년 |
- | 모용의 | 386년 | 건명 (建明) 386년 |
- | 모용요 | 386년 | 건평 (建平) 386년 |
- | 모용충 | 386년 | 건무 (建武) 386년 |
하동왕 | 모용영 | 386년 ~ 394년 | 중흥 (中興) 386년 ~ 394년 |
3. 1. 역대 군주 목록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열문황제[1] | 모용홍 | 384년 | 연흥 (燕興) 384년 |
위황제[2] | 모용충 | 384년 ~ 386년 | 연흥 (燕興) 384년 경시 (更始) 385년 ~ 386년 |
- | 단수 | 386년 | 창평 (昌平) 386년 |
- | 모용의 | 386년 | 건명 (建明) 386년 |
- | 모용요 | 386년 | 건평 (建平) 386년 |
- | 모용충 | 386년 | 건무 (建武) 386년 |
하동왕 | 모용영 | 386년 ~ 394년 | 중흥 (中興) 386년 ~ 394년 |
4. 평가 및 의의
역대 7명의 군주·황제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황제 권력이 매우 약한 국가였다. 원래 권력 기반이 부견에 의해 강제 이주된 관중의 선비를 주체로 건국되었기에, 고향으로의 동쪽 귀환을 희망하는 부하들의 의향에 황제도 좌우되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연보다 전연과의 혈연 관계가 가까웠고, 그것이 전연을 계승하는 입장의 왕조로서 존재 의의를 찾았지만, 권력 기반을 확립하지 못하고 천도를 반복하다가 결국 동족인 후연과 다투다 자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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